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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문제 해결책을 적극 찾아야■ 지금까지 결혼문제로 고민하는 당사자나 가족, 지인들의 수도 없는 전화를 받고 직접 만나왔습니다. 그런데 크리스천들의 결혼에 임하는 자세가 세상기준에 치우쳐 있고, 잘못 진단하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그로 인해 결혼문제가 안 풀려 더욱 위축되거나, 조급한 마음에 인본주의적 해결책을 강구하는 경우를 봅니다. 그러나
2017-10-23 12:43:34 | 반동연 | 0 | 조회 6640 | 덧글 0
■결혼문제 해결책을 적극 찾아야■

지금까지 결혼문제로 고민하는 당사자나 가족, 지인들의 수도 없는 전화를 받고 직접 만나왔습니다.

그런데 크리스천들의 결혼에 임하는 자세가 세상기준에 치우쳐 있고, 잘못 진단하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그로 인해 결혼문제가 안 풀려 더욱 위축되거나, 조급한 마음에 인본주의적 해결책을 강구하는 경우를 봅니다. 그러나 결혼해결의 열쇠는 그 자신에게 있음을 유념할 필요가 있고, 그걸 찾도록 도와줘야 합니다.

내면의 수많은 결혼장애요소를 해결하기 전까지 결혼문이 쉽게 안 열릴 것이고, 비록 결혼에 성공했더라도 결혼 후 매우 심각한 상황에 직면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미리 결혼준비를 잘해 결혼하는 게 중요하며, 건강하고 행복한 남녀결혼을 많이 해야 <불건강한 결혼>을 몰아내고 <동성결혼쓰나미>를 막아낼 수 있습니다. 

성경에 위배되는 온갖 불법/비윤리적 결혼을 막기 위해선 성경적 원리에 따르는 결혼을 많이 하도록 교회가 적극 나서서 도와야 합니다. 이제 우리에게 불법을 막아낼 시간이 얼마 안 남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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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셉결혼칼럼] 왜 결혼해야 하나요?》
헤세드 날짜 : 2006-09-23 11:07
 

http://www.hesedwem.net/bbs/tb.php/40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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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인의 격언 중 결혼에 관련된 몇 가지를 살펴보면, ‘인생에서 늦어도 괜찮은 것은 두 가지가 있다. 그것은 결혼과 죽음이다.’, ‘미인은 바라보는 것이지 결혼 상대는 아니다.’, ‘ 남자는 먼저 집을 짓고 들에 포도를 심어 포도원을 만들고 그런 다음에 여자를 맞이하라. 이 순서를 어겨서는 안 된다.’, ‘아내는 남편을 상대로 신혼 때에는 창부처럼, 다음엔 비서처럼, 그 다음엔 간호원처럼 처신하여야 한다.’ 등이 있습니다.


단순히 이것을 옳고 그름의 문제로 본다면 논쟁거리가 될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이것을 그냥 타산지석으로 삼을 만한 교훈 정도로 여긴다면 그래도 새겨들을 만한 내용이지 않나 싶습니다. 결혼의 때는 꼭 나이와 동일시될 수 없으며, 결혼할 배우자를 고를 때 외모만을 앞세워서는 안 되며, 남자와 여자의 지혜로운 처신과 도리에 충실하라는 교훈은 오늘날도 유효한 지혜가 아닌가 싶습니다.


만혼(晩婚)과 비혼(非婚), 불혼(不婚)이 만연한 오늘날 세태에서 결혼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고 정공법으로 접근하는 것은 대단한 용기와 불화살을 감내해야 하는 어려운 일일지도 모릅니다. 세상에서는 그런 힘들고 구속받을 결혼을 뭣 때문에 하냐는 아우성이 메아리치고 있고, 교회 내에서조차 하나님 일에 충성하면 되지 뭣 때문에 결혼하며 시간을 낭비하느냐는 식의 극단적 경건주의와 냉소주의가 우리를 압박하고 있습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모두들 결혼을 안 하는 것도, 그렇다고 모두들 쉽게 결혼하는 것도 아니기에 가치관이 혼란스럽기는 매한가지입니다. 어느 쪽이 옳다 그르다의 문제가 아니라, 결혼에 대해 어떠한 태도를 취하고 어떻게 접근하느냐가 보다 중요할 터인데, 정작 이 문제에 대해선 침묵으로 일관하거나 방관주의, 또는 극단적 냉소주의나 우월주의가 우리들의 의식을 지배하는 것을 종종 봅니다. 만일 결혼문제를 그렇게 무책임과 극단적 편견, 또는 부정적 태도로만 접근한다면 우리들의 미래는 어두울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결혼을 통한 가정과 성도들의 공동체인 교회를 선물로 주셨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한국교회 안에서는 교회만을 위한 교회, 가정과 분리된 교회를 이상적인 교회의 모델로 인식하는 그릇된 풍조가 엿보입니다. 교회 자체가 목적이 되고 주님은 뒷전이거나, 교회를 위해 무조건 가정의 희생을 강요하는 교회는 건강한 교회라고 볼 수 없을 것입니다. 교회는 주님을 위해 존재하고, 가정은 교회를 위해 존재하며, 인간은 가정을 위해 존재한다는 기본 삶의 철칙이 무너진다면, 정작 영광받아야 할 주님은 우리들의 어리석은 행동으로 슬퍼하실지도 모릅니다.


오늘날 많은 미혼청년들이 결혼을 뒷전으로 미루고(보다 엄밀히 말하면 결혼에 대한 해답을 찾지 못하고) 교회 안에서 안주(?)하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세상에서 찢기고 상처받은 심령을 위로받기 위함을 나무랄 수는 없겠지만, 결혼문제를 하나님의 뜻대로 풀지 못한 스스로의 과실로 인한 상처받음과 무시와 멸시를 무조건 세상으로부터의 핍박으로 돌려놓는다면, 어쩌면 그들에게 영영 결혼에 대한 응답이 오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제 글이 너무 단정적인 듯싶어 염려스럽습니다만, 오늘날 한국교회 미혼청년들의 실상을 접하고 있는 제겐 심각히 문제제기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오늘날 어떤 믿음 좋은 미혼청년들이 “왜 결혼해야 하나요?” 하고 반문하는 것을 봅니다. 이는 주님에 대한 아무런 헌신없이 결혼을 남들 따라 덩달아 하는 이들보다는 낫겠지만, 그렇다고 그들의 믿음이 옳다고만도 볼 순 없습니다. 어떤 기독교 역사학자가 중세(中世)의 고립주의와 극단적 경건주의를 중세역사발전의 걸림돌이라고까지 지적하는 것을 굳이 인용치 않더라도, 극단주의는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소금이 창고에만 썩혀 있으면 소용없듯,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에서 빛이 되고 소금이 되어야 하며, 하나님의 창조명령대로 지상에서 생육하고 번성해야 할 의무에 충실해야만 합니다. 사도 바울의 독신주의는 그 시대 절박한 상황에도 몇몇 사람들에게만 적용되었을 뿐, 모두에게 적용되어야 할 주님의 명령이 아닌 개인적 권면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임박한 환난과 주님을 위하여 결혼하지 말라고 권면하면서도, 결혼하는 것에 대해 죄라고 말하지 않고 오히려 정욕을 이기지 못할 때나 결혼시켜야 할 피치 못할 상황에서는 결혼을 시키라고 권면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그 시대와 같은 종말의 징조가 도처에서 횡행하는), 말세를 대비하여 독신으로 주님을 위해 헌신하겠노라 결단하는 젊은이들이 과연 얼마나 될까요? 아니, 그렇게 독신으로 헌신해야만 주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을까요? 어쩌면 이는 잘못된 편견과 영적 우월감에서 비롯된 그릇된 경건주의의 그림자가 아닐까요? 우리는 보다 냉정히 주님의 말씀을 살펴보아야 하고, 주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고린도전서 7장 7절에 나와 있듯이, 결혼과 독신 모두 주님께서 주신 은사라는 것입니다. 만일 어떤 청년이 은사를 받지 않았음에도 자신이 마치 독신의 은사를 받은 것처럼 행동한다면, 그는 하나님 앞에 잘못을 범하는 게 아니고 무엇입니까? 그와 반대로 독신의 은사를 받았을 경우엔 마땅히 주님을 위해 기쁨으로 헌신하며 주님께 영광 돌려야 하리라 봅니다. 또 한편 결혼의 은사를 받았다면, 결혼에 대해 보다 주밀하고도 체계 있게 준비해야 하며, 그 은사를 잘 활용하도록 애쓰고 노력해야 하지 않을까요?


그런데 오늘날 우리 주변을 돌아보면 이에 대해 전혀 준비가 안 돼 있고 잘못된 정보로 인해 오염되거나 왜곡된 모습과 극단적 단절을 엿보게 됩니다. 결혼을 전혀 준비하지 않는 미혼청년들이 교회 내에 넘쳐나도 그들이 마치 일평생 독신의 은사를 받은 사도 바울과 같은 사명자들인 것처럼 오해하며 그들을 무조건(?) 은혜의 도가니 속에 가둬놓고 그 곳에서 한 발짝도 벗어나지 못하도록 강요하는 형국이라면 지나친 확대 해석일까요.


그러나 필자는 오늘날 한국교회가 심각한 동맥경화증 환자처럼, 심각한 결혼미숙아와 결혼실패자들로 넘쳐나고 있다고 감히 진단하고 싶습니다. 그만큼 우리 주변엔 결혼에 대해 사전준비가 전혀 없이 무작정 나이를 먹어가는 미혼청년들이 늘어가고, 그들로 인해 가정마다 심각한 고민에 빠져 있고, 교회 청년부에서조차 그들을 감당하지 못해 나이를 핑계로 무책임하게 미안하단 말 한마디 안 하고 내쫓는 과오를 뻔뻔스레 범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이러한 비극적 현실에 눈을 감고 오직 헌신! 헌신! 경건! 경건! 외치는 사역자는 주님의 일에 게으른 종이 아닐까요? 이제껏 공들여 기르고 양육한 30~40대 미혼청년들을 교회성장의 동력원으로 삼지 못하고 결혼문제 때문에 잃어버린다면 그보다 더한 손실이 어디 있겠습니까? 필자는 애통의 심정으로 그러한 청년들을 긍휼의 눈길로 바라보아야 하며, 저들의 심각한 현실의 결혼문제를 개교회에서 신속히 도와달라고 간곡히 호소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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