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m.movie.naver.com/m/endpage/movie/MultimediaDetail.nhn?movieCode=150637&multimediaId=35864
[줄거리]
1636년 인조14년 병자호란. 청의 대군이 공격해오자 임금과 조정은 적을 피해 남한산성으로 숨어든다. 추위와 굶주림, 절대적인 군사적 열세 속 청군에 완전히 포위된 상황, 대신들의 의견 또한 첨예하게 맞선다. 순간의 치욕을 견디고 나라와 백성을 지켜야 한다는 이조판서 ‘최명길’(이병헌)과 청의 치욕스런 공격에 끝까지 맞서 싸워 대의를 지켜야 한다는 예조판서 ‘김상헌’(김윤석). 그 사이에서 ‘인조’(박해일)의 번민은 깊어지고, 청의 무리한 요구와 압박은 더욱 거세지는데... 나아갈 곳도 물러설 곳도 없는 고립무원의 남한산성 나라의 운명이 그곳에 갇혔다!
《장편소설 남한산성》
저자?김훈 출판사?학고재 2007.04.14
그해 겨울, 47일 동안 성 안에서 무슨 일이 있었나?
http://m.book.naver.com/bookdb/book_detail.nhn?biblio.bid=2889817#
<칼의 노래>, <현의 노래>의 작가 김훈이 3년 만에 발표한 신작 장편소설. 병자호란 당시, 길이 끊겨 남한산성에 갇힌 무기력한 인조 앞에서 벌어진 주전파와 주화파의 다툼, 그리고 꺼져가는 조국의 운명 앞에서 고통 받는 민초들의 삶이 소설의 씨줄과 날줄을 이루어, 치욕스런 역사를 보여준다.
1636년 병자년 겨울. 청의 대군은 압록강을 건너 서울로 진격해 오고, 조선 조정은 길이 끊겨 남한산성으로 들 수밖에 없었다. 소설은 1636년 12월 14일부터 1637년 1월 30일까지 47일 동안 고립무원의 성에서 벌어진 말과 말의 싸움, 삶과 죽음의 등치에 관한 참담하고 고통스러운 낱낱의 기록을 담았다.
쓰러진 왕조의 들판에도 대의는 꽃처럼 피어날 것이라며 결사항쟁을 고집한 척화파 김상헌, 역적이라는 말을 들을지언정 삶의 영원성이 더 가치있다고 주장한 주화파 최명길, 그 둘 사이에서 번민을 거듭하며 결단을 미루는 임금 인조. 그리고 전시총사령관인 영의정 김류의 복심을 숨긴 좌고우면, 산성의 방어를 책임진 수어사 이시백의 기상은 남한산성의 아수라를 한층 비극적으로 형상화한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
《병자호란(丙子胡亂)》
http://m.terms.naver.com/entry.nhn?docId=576441&cid=46622&categoryId=46622
- 이칭별칭 병정노란(丙丁虜亂)
- 발생·시작 일시 1636년 12월
- 종결 일시 1637년 1월
정의
1636년(인조 14) 12월부터 이듬해 1월에 청나라가 조선에 대한 제2차 침입으로 일어난 전쟁. 병자년에 일어나 정축년에 끝났기 때문에 병정노란(丙丁虜亂)이라 부르기도 한다.
배경
1627년 후금(後金: 뒤의 淸)의 조선에 대한 1차 침입 때 조선은 무방비 상태로 후금에 당함으로써 후금에 대해 형제의 맹약을 하고 두 나라 관계는 일단락되었다.
한편, 조선은 정묘호란 이후 후금의 요구를 들어 1628년(인조 6) 이후 중강(中江)과 회령(會寧)에서의 무역을 통해 조선의 예폐(禮幣: 외교관계에서 교환하는 예물) 외에도 약간의 필수품을 공급해 주었다.
그러나 그들은 당초의 맹약을 위반하고 식량을 강청하고 병선(兵船)을 요구하는 등 온갖 압박을 가해왔다. 그뿐 아니라 후금군이 압록강을 건너 변경 민가에 침입해 약탈을 자행하므로 변방의 백성과 변방 수장(守將)들의 괴로움은 말로 형언하기 어려웠다.
이러한 후금의 파약(破約) 행위로 조선의 여론은 군사를 일으켜 후금을 치자는 척화배금(斥和排金: 후금에 대하여 화의를 반대함)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격증하게 되었다.
당시 후금은 만주의 대부분을 석권하고 만리장성을 넘어 북경 부근까지 공격하면서 정묘호란 때 맺은 ‘형제의 맹약’을 ‘군신(君臣)의 의(義)’로 개약(改約)하자고 요청을 해올 뿐 아니라, 황금·백금 1만냥, 전마(戰馬) 3,000필 등 종전보다 무리한 세폐(歲幣)와 정병(精兵) 3만까지 요구해왔다.
조선에서는 이러한 그들의 요구에 응하려 하지 않고 화의 조약을 무시하고 후금에 대해 선전 포고를 하려는 움직임까지 일어나기 시작했다.
또한, 1636년 2월에는 용골대(龍骨大)·마부태(馬夫太) 등이 후금 태종(太宗)의 존호(尊號)를 조선에 알림과 동시에 인조비 한씨(韓氏)의 문상(問喪)차 조선에 사신으로 왔는데, 그들이 군신의 의를 강요해 조선의 분노는 폭발하게 되었다.
조정 신하들 가운데 척화(斥和)를 극간(極諫)하는 이가 많아 인조도 이에 동조해 사신의 접견을 거절하고 국서(國書)를 받지 않았으며 후금 사신을 감시하게 했다.
조선의 동정이 심상하지 않음을 알아차린 그들은 일이 낭패했음을 간파하고 민가의 마필을 빼앗아 도주했는데, 공교롭게도 도망치던 도중에 조선 조정에서 평안도관찰사에 내린 유문(諭文)을 빼앗아 본국으로 가져가게 되었다.
이로 인해 후금에 대한 조선의 태도가 무엇인지를 그들도 비로소 명확하게 알 수 있게 되었고 재차 침입을 결심하게 된 것이다. 같은 해 4월 후금은 나라 이름을 ‘청’으로 고치고 연호를 숭덕(崇德)이라 했으며, 태종은 관온인성황제(貫溫仁聖皇帝)의 칭호를 받았다.
그는 이 자리에 참석한 조선 사신에게 왕자를 볼모로 보내서 사죄하지 않으면 대군을 일으켜 조선을 공략하겠다고 협박했다. 이와 같은 청나라의 무리한 요구는 척화의지가 고조되고 있는 조선 조정에 받아들여질 리 없었다.
그 해 11월 심양(瀋陽)에 간 조선 사신에게 그들은 왕자와 대신 및 척화론을 주창하는 자를 압송하라는 최후 통첩을 보내왔으나 조선에서는 그들의 요구를 묵살했다. 이에 청나라는 조선에 재차 침입해왔는데 이것이 병자호란이다.
경과
청태종은 몸소 전쟁에 나설 것을 결심하고 1636년 12월 1일에 청군 7만, 몽골군 3만, 한군(漢軍) 2만 등 도합 12만의 대군을 심양에 모아 예친왕(禮親王) 대선(代善), 예친왕(睿親王) 다이곤(多爾袞), 예친왕(豫親王) 다탁(多鐸)과 패륵(貝勒) 악탁(岳託)·호격(豪格)·두도(杜度) 등을 이끌고 다음 날 몸소 조선 침입에 나섰다.
9일에 압록강을 건너 다탁은 전봉장(前鋒將) 마부태에 명해 바로 서울로 진격하도록 했다. 마부태는 의주부윤 임경업(林慶業)이 백마산성(白馬山城)을 굳게 수비하고 있음을 알고, 이를 피해 밤낮을 달려 심양을 떠난 지 10여일 만에 서울에 육박했다.
청군이 압록강을 건너 조선을 침입했다는 급보가 중앙에 전달된 것은 12일로서 의주부윤 임경업과 도원수 김자점(金自點)의 장계(狀啓)가 도착한 뒤였다. 보고에 접한 조정에서는 비로소 적의 형세가 급박한 것을 알고는 있었으나, 이렇게 빨리 진격해오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13일 오후 늦게 재차 장계가 이르러 청군이 이미 평양에 도착했다고 하자 조정은 갑작스런 변란에 황망해 결단을 내리지 못했다. 도성 안은 흉흉해 성을 빠져나가는 자들로 줄을 이었다.
다음 14일 개성유수의 치계(馳啓)로 청군이 이미 개성을 지나갔다는 것을 알게 되자 급히 판윤 김경징(金慶徵)을 검찰사(檢察使)로, 부제학 이민구(李敏求)를 부사(副使)로 명하고 강화유수 장신(張紳)으로 주사대장(舟師大將)을 겸직시켜 강화를 수비하도록 했다.
한편, 원임대신(原任大臣) 윤방(尹昉)과 김상용(金尙容)에게 명해 종묘사직의 신주를 받들고 세자빈 강씨(姜氏), 원손(元孫), 둘째아들 봉림대군(鳳林大君), 셋째아들 인평대군(麟坪大君)을 인도해 강화도로 피하도록 했다. 심기원(沈器遠)을 상중에서 불러내어 유도대장(留都大將)으로 삼고 호조참의 남선(南銑)을 찬획사(贊劃使)로 삼았다.
인조도 그날 밤 숭례문으로 서울을 빠져 나와 강화도로 향했으나, 적정을 탐색하던 군졸이 달려와서 청국군이 벌써 영서역(迎曙驛: 지금의 서울 은평구 대조동과 불광동 사이)을 통과했으며, 마부태가 기병 수백을 거느리고 홍제원(弘濟院)에 도착해, 한 부대를 보내 양천강(陽川江)을 차단해 강화도로 가는 길이 끊겼다고 보고했다.
인조는 다시 성안으로 들어와 숭례문 누각에 앉아 사후 대책을 물으니, 전 철산부사 지여해(池如海)가 정병(精兵) 500을 주면 사현(沙峴)에 나가 청군의 선봉 부대를 무찌르겠다고 했다.
그 말에 여러 신하들은 500의 군사로 적을 시험하는 것은 위험하다는 반대 의사를 개진했다. 결국, 이조판서 최명길(崔鳴吉)이 홍제원 청군 진영에 나가 술과 고기를 먹이며 출병의 이유를 물으면서 시간을 지연시키는 사이에 인조는 세자와 백관을 대동하고 남한산성(南漢山城)으로 들어갔다.
인조 일행이 남한산성으로 들어간 뒤 영의정 김류(金瑬) 등은 본 산성이 지리적으로 불리함을 들어 야음을 타서 강화도로 옮겨갈 것을 역설하므로 다음 15일 새벽에 인조는 산성을 떠나 강화도로 떠나려 했다.
그러나 마침 눈이 내린 뒤라 산 언덕에 얼음이 얼어서 왕이 탄 말이 미끄러져 왕은 말에서 내려 걸어서 갔는데, 여러 번 미끄러져 몸이 편안하지 못해 강화도로 가는 것을 포기하고 다시 산성으로 돌아왔다.
훈련대장 신경진(申景禛)이 서울로부터 뒤따라오니 그에게 동성(東城) 망월대(望月臺)를 지키게 하고, 이영달(李穎達)을 중군(中軍)으로 삼고 총융사 구굉(具宏)에게 남성(南城)을 지키게 했다.
또, 수원부사 구인후(具仁垕)를 부장(副將)으로 삼고 상중에 있던 이확(李廓)을 불러 중군을 삼았으며, 어영대장 이서(李曙)는 북성(北城)을, 수어사 이시백(李時白)은 서성(西城)을 지키고 이직(李稷)을 중군으로 삼았다.
이때 영남의 분방병(分防兵)은 아직 도착하지 않은 채 여주목사 이필원(李必遠), 이천부사 조명욱(曺明勗), 양근군수 한회일(韓會一), 지평현감 박환(朴煥) 등이 약간의 군사를 이끌고 입성했고, 파주목사 기종헌(奇宗獻)이 수백의 군사를 거느리고 들어와 구원했다.
이때 성안에 있는 군사는 1만 3000명으로 성첩(城堞)을 지키도록 하고, 도원수·부원수와 각 도의 관찰사와 병사에게는 근왕병(勤王兵)을 모으도록 하는 한편, 명나라에 위급함을 알려 원병을 청했다.
이 때 성안에는 양곡 1만 4300석(石), 장(醬) 220 항아리가 있어 겨우 50여 일을 견딜 수 있는 식량에 불과했다. 청군의 선봉 부대는 12월 16일에 이미 남한산성에 이르고 대신 담태(潭泰)의 군사도 아무런 저항을 받지 않고 서울에 입성해 그 길로 한강을 건너 남한산성을 포위했다.
청태종은 다음해 1월 1일에 남한산성 밑 탄천(炭川)에서 20만의 군사를 포진하고 성 동쪽의 망월봉(望月峰)에 올라 성안을 굽어보며 조선군의 동태를 살폈다. 포위를 당한 성안의 조선군은 12월 18일 어영부사(御營副使) 원두표(元斗杓)가 성안의 장사를 모집, 성을 빠져나가 순찰중인 적군 6명을 죽이고, 동월 20일 훈련대장 신경진의 군이 출전해 또 적군 30명을 죽였으며, 다음날 어영대장 이기축(李起築)이 군사를 이끌고 서성을 나가 적군 10명을 또 죽여 성안에 사기를 올렸다.
그러나 이렇다할 큰싸움 없이 40여일이 지나자 성안의 참상은 말이 아니었다. 이러할 즈음 각 도의 관찰사와 병사가 거느리고 올라왔던 관군들은 목적지에 이르기도 전에 무너졌다.
충청도관찰사 정세규(鄭世)의 군사는 험천(險川)에서 패해 이성현감(尼城縣監) 김홍익(金弘翼), 남포현감(藍浦縣監) 이경(李慶) 등이 전사했고, 경상좌병사 허완(許完)과 경상우병사 민영(閔泳)의 군사도 광주(廣州) 쌍령(雙領)에서 괴멸해 두 병사도 전사했다.
전라병사 김준룡(金俊龍)은 경기 용인 광교산(光敎山)에 이르러 적장 액부양고리(額駙揚古利)를 죽이고 승첩을 거두었으나 뒤에 역습을 당해 수원으로 퇴각한 뒤 전군이 무너졌다.
또, 평안도관찰사 홍명구(洪命耉)는 금화(金化)에서 전사하고 부원수 신경원(申景瑗)이 맹산(孟山) 철옹(鐵甕)에서 사로잡혔으며, 도원수 김자점의 군사가 토산(兎山)에서 패주하고 강원도관찰사 조정호(趙廷虎), 함경남도관찰사 민성휘(閔聖徽)의 군사도 패배해 중도에서 좌절되니, 남한산성은 고립무원(孤立無援)의 절망적인 상태가 되었다.
앞서 명나라에 구원을 청한 것도 국내 유적(流賊)으로 인해 원병을 보낼만한 처지가 못되었고, 겨우 등주총병(登州總兵) 진홍범(陳弘範)에 명해 수군을 동원하려 했으나 그것도 바람과 파도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이 때 경기·호남·경상도 등지에서 의병이 일어나서, 경기도에서는 적병이 강화성을 공략할 때 다소의 전과를 거두었고, 호남에서는 전 참의 정홍명(鄭弘溟)이 많은 의병을 이끌고 공주에까지 이르렀으나 이미 화의가 이루어진 뒤라 군사를 파했다.
경상도에서는 김식회(金湜會)의 의병이 여주에서 퇴주하는 경상도관찰사 심연(沈演)의 군사와 함께 조령(鳥嶺)·죽령(竹嶺) 사이를 잠행하다가 청군의 기습이 있다는 와전(訛傳)을 듣고 도산해 실전에 임해보지도 못했다. 또한, 의승군(義僧軍)도 봉기했으나 큰 전공을 세우지는 못했던 것 같다.
이상에서 보는 것과 같이 남한산성으로 구원오는 군사가 모두 붕괴되고 성중은 안과 밖이 끊어져서 의지할 곳이 없게 되자 차차 강화론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주화파(主和派)는 주전파(主戰派)와의 여러 차례 논쟁을 거듭했으나, 주전파 역시 난국을 타개할 방도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예조판서 김상헌(金尙憲), 이조참판 정온(鄭蘊) 등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대세는 강화를 지지하는 쪽으로 기울게 되었다.
1637년 1월 3일 최명길·이식(李植)·장유(張維)로 하여금 회답하는 국서를 초(草)하도록 했는데, 최명길의 글이 공손하다 하여 그것을 채택하고 좌의정 홍서봉(洪瑞鳳), 호조판서 김신국(金藎國) 등을 청군 진영에 보내 화호(和好)를 청했다.
그러나 청태종의 답서는 조선 국왕이 친히 성안에서 나와 자기 군문(軍門)에 항복하고 척화주모자 2, 3인을 결박지어보내라는 내용이어서, 조선은 이에 응하지 않고 정론(政論)이 구구해 주저하고 있었다. 이 때 강화도가 함락되었다는 보고가 성안에 이르렀다.
강화도 수비를 맡은 검찰사 김경징은 대신이나 대군의 말도 믿지 않고 마음대로 일을 처리해 성안에 있는 피난민이나 섬 사람들의 신임을 얻지 못했으며, 청군이 강화도만은 침입하지 못할 것이라 호언장담을 했다.
강화유수 겸 주사대장 장신은 ‘검찰사의 지휘 명령을 받들 사람이 아니라’고 서로 배척하는 등 알력이 심해 강화 수비에 많은 문제를 안고 있었다. 1월 21일 밤 초경(初更)에 청군이 강화도를 침입하자 김경징은 그제야 놀라서 파수계책을 일르면서 화약과 총탄을 나누어주었다.
부마(駙馬) 윤신지(尹新之)로 대청포(大靑浦)를 지키게 하고, 유정량(柳廷亮)은 불원(佛院)을, 유성증(兪省曾)은 장령(長零)을, 이경(李坰)은 가리산(加里山)을 각각 지키게 하는 한편, 김경징 자신은 진해루(鎭海樓) 아래로 나가서 갑곶(甲串)을 지키려 했다. 그러나 군사가 적은데다 새로 모집하는 군사들도 흩어져서 결국 강화도성을 지키기로 했다.
한흥일(韓興一)과 정백형(鄭百亨)을 시켜 성안에 피난온 사람을 이끌고 성첩을 나누어 지키게 하고, 연미(燕尾) 서쪽을 풍덕군수 이성연(李聖淵)이, 연미 북쪽은 개성유수 한인(韓仁)이, 갑곶 아래는 첨지(僉知) 유성증이, 선원(仙源) 이하는 유정량이, 광성 이하는 윤신지가 각각 지켰다.
청군이 나루터에 주둔해 홍이대포(紅夷大砲)를 쏘니 포탄이 물을 넘어 육지 몇 리밖에 떨어졌다. 이를 본 김경징과 이민구는 놀라 부성(府城)으로 들어가려 했으나 주위의 반대로 들어가지 못했다.
주사대장 장신은 해전을 벌리려다 도중에 퇴각해 싸움을 회피하니 강화도의 위급은 촌각에 달려 있었다. 청군은 복병을 의심해 배를 출발시키지 않고 1척을 먼저 보내 7명을 상륙시켰다. 이것을 본 관군이 조총(鳥銃)을 쏘았으나 화약에 습기가 차서 불발되었다.
적병 7명은 해안을 둘러봐도 사방에 복병이 없자 흰 깃발을 흔들어 부르니 일시에 적의 대군이 밀어닥쳤다. 성의 수비를 맡은 김경징과 이민구는 말을 버리고 나룻배를 타고 장신의 전선에 올라타고 함께 도망하니, 남은 것은 부성 안에 있는 빈궁(嬪宮)과 왕자 및 대신들로 싸움에 익숙하지 못한 사람들뿐이었다.
대신들이 명해 부성을 사수할 것을 결의했다. 빈궁이 일의 급박함을 듣고 통곡하며 성을 나가 바다를 건너가려 했으나 비국(備局)이 문을 굳게 지키고 열지 않았다.
이에 내관 김인(金仁) 등을 불러 원손을 보호하고 피신할 것을 부탁해 그들은 원손을 모시고 교동(喬桐)에 이르렀다가 주문도(注文島)로 옮겨 그대로 당진(唐津)으로 향했다.
부성이 함락되자 청군은 성안에 들어와 숙의(淑儀)와 빈궁과 봉림·인평 두 대군 및 대군의 부인을 협박해 나오게 하고, 드디어 군사를 풀어 크게 약탈을 자행하고 관가(官家)와 사가(私家)를 막론하고 모조리 불사르며 살육과 약탈을 자행한 뒤 다시 물을 건너 남한산성으로 향했다. 강화도에서 순절한 사람으로는 원임대신 김상용 등의 관원과 어린이, 부녀자들도 많았다.
한편, 남한산성에서는 적의 포위 속에 있으면서 화(和)·전(戰) 양론이 팽팽이 맞서다가 주화론이 우세해 인조의 출성이 목전에 다가오자 예조판서 김상헌과 이조참판 정온이 화의를 반대 자결을 꾀하려다 실패했다.
이 때 청군은 강화도에서 포로가 된 대군의 수서(手書)와 재신(宰臣) 윤방과 한흥일 등의 장계를 보이면서 독촉했다. 강화도의 함락 사실을 확인한 인조는 드디어 출성을 결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홍서봉·최명길·김신국 등이 적진을 왕복하며 항복의 조건을 제시하고, 또 청군 진영에서도 용골대·마부태 등의 사신이 우리 성안에 들어와서 조건을 제시한 끝에 다음과 같은 조약에 합의했다.
첫째, 조선은 청에 대해 신의 예를 행할 것. 둘째, 명에서 받은 고명책인(誥命冊印)을 바치고 명과의 교호(交好)를 끊으며 조선이 사용하는 명의 연호를 버릴 것. 셋째, 조선왕의 장자와 차자 그리고 대신의 아들을 볼모로 청에 보낼 것.
넷째, 청이 명을 정벌할 때 조선은 기일을 어기지 말고 원군을 파견할 것. 다섯째, 가도(椵島, 椴島라는 설도 있음.)를 공취할 때 조선은 배 50척을 보낼 것. 여섯째, 성절(聖節)·상삭(上朔)·동지(冬至)·중궁천추(中宮千秋)·태자천추·경(慶)·조(弔) 사신의 파견은 명의 구례(舊例)를 따를 것.
일곱째, 압록강을 건너간 뒤 피로인 중에서 도망자는 전송할 것. 여덟째, 내외제신과 혼인을 맺어 화호(和好)를 굳게 할 것. 아홉째, 조선은 신구(新舊) 성원(城垣)을 보수하거나 쌓지 말 것. 열번째, 올량합인(兀良合人)은 마땅히 쇄환할 것. 열한번째, 조선은 기묘년(1639)부터 세폐를 보낼 것 등이었다.
이상 11조문은 조선으로서는 힘겨운 부담이며 고통이었다. 드디어 1월 30일 인조는 세자와 함께 호곡(號哭) 소리가 산성 안을 가득히 채운 채 서문으로 출성해 한강 동편 삼전도(三田渡)에서 성하(城下)의 맹(盟)의 예를 행한 뒤 한강을 건너 서울로 돌아왔다.
청은 왕자를 비롯한 강화의 부로(浮虜)를 일부 송환한 다음 군중에 유치하였던 조선의 세자·빈궁·봉림대군(뒤의 효종)을 볼모로 삼고 미리 유치했던 척화론의 주모자 오달제(吳達濟)·윤집(尹集)·홍익한(洪翼漢)을 잡아 제도의 군사를 거두어 심양으로 돌아갔다.
비록, 한달 남짓한 짧은 전쟁 기간이었으나 그 피해는 임진왜란에 버금가는 것이요 조선으로서는 일찍이 당해보지 못한 일대 굴욕이었다. 이로써 조선은 명과의 관계를 완전히 끊고 청나라에 복속하게 되었다. 이와 같은 관계는 1895년 청일전쟁에서 청나라가 일본에 패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청군은 철수하는 도중 4월에 가도의 동강진(東江鎭)을 공격했는데 이때 청태종은 패륵 악탁과 명나라의 항장(降將) 공유덕(孔有德) 등에 명해 용산(龍山)에서 병선을 만들게 했다.
조선에서도 황해도의 병선을 얻어 그 준비를 갖추었는데, 항복 조건에 따라 조선은 평안병사 유림(柳琳)을 수장(首將), 의주부윤 임경업을 부장(副將)으로 삼아 청군을 도와 싸우게 하였다.
임경업은 척후장 김여기(金礪器)를 몰래 보내 명 제독 심세괴(沈世魁)에게 피하도록 알렸으나, 그는 굴하지 않고 1만의 군사와 함께 역전하던 끝에 전사해 동강진은 17년 만에 완전히 붕괴되었다.
결과
일단 전쟁이 끝을 맺자 전후 처리 문제가 거론되지 않을 수 없었다. 강화도의 실함이 인조의 남한산성 출성(出城)을 재촉케 했으니 우선 강화도 방수에 직임을 맡았던 장수들의 책임을 묻지 않을 수 없었다.
먼저 강화유수 겸 주사대장(舟司大將)으로 해상의 방어를 맡았던 장신은 바다를 지키지 않고 도주한 죄로 왕명에 의해 스스로 자살하도록 했다.
검찰사로서 강화 수비의 총책을 맡았던 김경징이 사사되었으며, 강화 수비의 부책임자였던 이민구는 영변에 위리안치(圍籬安置)되었다. 충청수사 강진흔(姜晉昕)은 사력을 다해 바다를 지켰으나 억울한 죽음을 당했다.
한편, 강화부성이 함락될 때 전현직 관료나 아직 벼슬에 나가지 않은 많은 선비들이 순절했고, 부녀자들이 바다에 뛰어들거나 목을 메어 절개를 지켰는데 난이 끝나자 이들의 충절과 절개를 기리기 위해 나라에서 벼슬을 추증하거나 정문(旌門)을 내렸으며, 단(壇)을 설치해 죽은 자들의 영혼을 위로했다. 또 전장에서 싸우다 전사한 자에게까지 휼전(恤典)을 베풀고 시상했다.
난이 끝난 뒤 조선과 청 두나라는 종번관계(宗藩關係)로 굳어져 가면서 청의 위협과 조선의 복종이 강요되었다. 조선은 병자호란을 종속시키기 위한 화의 교섭을 통해 명과의 국교를 단절하고 청조로부터 ‘조선국왕’으로 책봉됨으로써 군신 관계가 재확인됐다. 이로부터 조선은 속국이 확인된 셈이다.
청은 또 인조가 항복의 예를 행한 삼전도에 청태종의 공덕을 칭송하고 청군의 승전을 기념하기 위한 비의 건립을 조선에 강요해 어쩔 수 없이 응하게 되었다.
인조가 남한 출성에 앞서 합의한 강화 조약의 기본 원칙에는 연호 문제가 주요 사안으로 채택되었다. 그것은 조선이 지금까지 사용해오던 명의 ‘숭정(崇禎)’이란 연호를 버리고 청의 ‘숭덕(崇德)’이라는 연호를 사용한다는 약속이었다.
그러나 전쟁이 끝난 뒤에도 수개월 동안은 제대로 약속이 이행되지 않았다. 이에 청은 청나라의 연호만 쓸 것을 강력히 촉구했다. 이에 결국 인조는 청과의 불필요한 분쟁을 사전에 막기 위해 공사 문서에 청나라 연호인 숭덕을 사용할 것을 내외에 명했다. 그러나 개인 문서나 제향(祭享)의 축사(祝詞)에는 의례히 명의 연호가 사용되고 있다.
청에 대한 배척 의식이 고조되어가는 과정에서 청은 여러 차례에 걸쳐 조선군의 출병을 요구해왔다. 그것은 청태종이 명의 금주(錦州)를 공격하기 위함이었다. 파병 반대 여론이 강했으나 군대를 보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청군과 함께 참전한 조선군의 상장 임경업은 청군들이 모르게 40여척의 병선을 중도에서 빼돌리고 남은 80여 척의 배만 이끌고 대릉하(大凌河)·소릉하(小凌河) 하구를 거쳐 개주(蓋州)에 도착한 다음 더 이상 나아가지 않고 명·청 양군의 대결을 관망하고 있었다.
이를 알아챈 청태종은 임경업에게 조선 전함 3척을 명과의 경계선인 등주(登州) 앞바다에 척후로 보내어 명군의 움직임을 살피게 하고 임경업의 조선 수군을 철저히 감시했다.
그러나 임경업은 척후선으로 명군과 은밀히 내통해 청군의 동태를 명의 진영에 보고하고 조선의 파병이 불가피한 것이었음을 알리게 하였다.
임경업의 반청 행위가 탄로되자 청태종은 임경업의 군대를 조선에 돌려보내 강화 조약의 불이행을 엄중히 항의했다. 1641년 청태종은 또 조선에 대해 원군의 파견을 요청해 조선은 2,000명에 달화는 포수·기병·마부 등을 동원하여 유림(柳琳)을 주장으로 삼아 출동하게 했다.
조선군은 심양에 도착해 청태종의 열병을 받고 5월에 청군과 함께 금주 싸움에 참가했다. 그러나 명·청 양군이 치열하게 전투를 전개하는데도 조선군의 주장 유림은 병을 이유로 싸움에 나가지 않고 은밀히 군중에 명해 공포를 쏘아 명군에 피해를 입히지 않도록 했다.
조선군이 대명전에서 싸움을 기피하는 것을 알아차린 청은 조선군의 주장을 교체시킬 것과 포수 500명을 증원해 줄 것을 요구했다. 이에 조선 정부는 통제사 유정익(柳廷益)을 유림의 후임으로 삼아 포수 500명을 이끌고 금주로 향하도록 했다.
여러 차례에 걸친 조선 원군의 파병은 청의 일방적인 강압에서 이루어진 것이어서 조선군이 전투에 임하는 자세는 지극히 소극적이었다. 따라서 조선군의 협력을 얻어 명을 치자는 청의 의도는 실효를 거둘 수 없었고 조선의 반감만 증폭시켜 청에 대한 적개심만 조장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전후에 처리해야 될 심각한 문제는 청군에게 강제 납치된 수만(다른 기록에는 50만)인의 속환 문제였다. 특히, 청군도 납치한 남녀노소의 양민을 전리품으로 보고 속가(贖價: 포로를 풀어주는 대가로 내는 돈)를 많이 받을 수 있는 종실과 양반의 부녀를 되도록 많이 잡아가려 했다.
그러나 대부분 잡혀간 사람들은 속가도 마련할 수 없는 가난한 사람들이었다. 속가는 싼 경우 1인당 25 내지 30냥이나, 대개의 경우 150 내지 250냥이었고, 신분에 따라 비싼 것은 1,500냥에 이르렀다.
여기에 순절하지 못하고 살아서 돌아온 것은 조상에게 죄를 짓게 된다고 해 속환 사녀(士女)의 이혼 문제가 정치·사회 문제로 대두되기도 했다. 10년의 볼모 생활을 하다가 소현세자(昭顯世子)와 봉림대군은 1645년(인조 23)에 환국했으나 세자는 2개월 만에 죽었다.
그리고 인조의 뒤를 이은 봉림대군은 왕위에 오른 뒤 볼모 생활의 굴욕을 되새기며 재야의 인사를 발탁하고 군비를 확장하는 등 북벌의 원대한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그 역시 재위 10년 만에 세상을 떠나자 실천에 옮기지 못했다.
《1623 인조(16대,인조반정,정묘호란,병자호란》
2016.11.27 13:36?tehan78?
http://m.blog.daum.net/_blog/_m/articleView.do?blogid=0S1Zj&articleno=604
선조의 손자
인조반정으로 즉위
인조반정(1623.4.11)
- 1575년 사림은 서인/동인으로 나뉨
- 선조후기 서인/북인(낙동강 서쪽 조식 계열)+남인(낙동강 동쪽 이황 계열) 으로 나뉨
- 임진왜란 이후 북인이 득세하여 광해군을 옹립
- 1623년 서인들이 광해군을 몰아내고 능양군을 옹립
정묘호란(1627)
- 광해군때는 명,후금과 적절히 외교를 잘하다가, 인조 즉위후 서인세력과 친명배금 정책실시
- 이를 빌미(반정으로 인조 즉위알고, 광해군 원수갚는다는 명분)로 금이 조선 침략.
- 인조는 강화도로 피난 (임진왜란때 선조가 했듯이)
- 금은 명과의 전투가 더 중요해서, 일단 조선과 화의하고 형제관계를 맺음
그러나, 조선은 명과의 관계는 계속 유지함
병자호란(1636.12~ 이듬해 1월)
- 당시 정세는 명이 쇠퇴하고, 청이 떠오르는 중
(정묘호란 이후 시기에 후금에서 청으로 국호 변경됨)
청은 임진왜란을 통해 입증된 조선의 해군력이 탐이나서 조선에 회유함
이후 명나라에서 귀화한 장수중에 해군함대 끌고온 장수있어서 청은 아쉬울게 없어지고
몽골도 청에 복속되어 모두 홍타이치(칸)을 황제로 추대함, 홍타이치도 칭제(스스로 황제라 칭함) 결심
이과정에 조선의 의중 물어보려 몽골왕자를 구성으로 사절단 보내어 군신관계 요구
- 조선은 사신접견 거부하고, 즉위식 참석한 조선사신은 홍타이지에게 배래하지 않는등 친명정책 고수 표명
* 청은 여진족이 세운 나라라서 오랑캐라고 멸시했고, 조선은 존명사대의 명분에 갇혀있었음.
만약 이때에 조금 굴욕적이라도 군신관계 받아들였다면 전쟁을 피할수 있었을까?
아니면, 진짜로 한판 붙을꺼면 청의 최후통첩 받고 7개월 동안 기다리면서(청은 압록강이 얼기를
기다렸다고 보는시각이 있음) 준비를 잘 하던지..
- 이에 청은 명을 공격하기 전에 배후의 안전을 확보할 목적으로 조선 침략
* 어쩌면 정묘호란은 배후위협 제거를 위한 전략적 전쟁이고, 병자호란은 명나라로 편을 정한 조선을
징벌하기 위한 전쟁일수 있다.
- 인조는 평양함락 소식듣고 강화도로 가려했는데 길목이 막혀 남한산성으로 들어가 항전. 보급 끊겨 항복
※ 당시 척화파의 거센 반대, 실제 도망갈 궁리(강화도)만 하고 실질적으로 청과 싸을 대책 없었으면서
인조(숭명정책)는 척화파 손 들어줌, 변방에 경계강화 지시 밀서 보내다가 들킴
- 인조는 삼전도에 청태종에게 삼배고구도(항복예식) 실시. "삼전도의 굴욕" "삼전도비" 세움 (서울 송파)
* 삼배고구도 : 9층계단의 수항단에 청태종 앉고, 인조는 머리를 땅에 박아 소리가 청태종에게 들려야함
- 이로써 명나라와 관계 완전히 끊어지고 청의 간섭을 받게됨
* 청에게 조공하고, 명과 단절하고, 명과 전쟁에 파병하고, 군사훈련 금지하고, 성 보수/축조할때 보고하고
소현세자(인조 아들), 세자빈 강씨와 봉림대군(인조 차남), 백성 60여만명은 볼모로 심양에 끌려가고..
이때 생겨난 단어가 환향녀(정조를 잃었다는 뜻의), 호로자식, 몽고반점..
* 명이 결국 멸망하여 소현세자는 8년만에 돌아옴. 그는 청에서 생활하며 카톨릭선교사로부터 서구문명
접하고, 몽골어 배우고, 서역원정 출정으로 군사경험 쌓는 등 청의 선진적 모습보며 친청적인 입장이
되었으나, 이는 옹졸한 인조의 시각에서는 수치스럽고 분노유발하는 존재가 됨
시대상황 깨닫지 못하고 미리 대비하지 못해서 당한 화
너무나 주관적인 시각의 세계관
이후 청을 오랑캐라 보던 시각이 서양을 배척하는걸로 전향되어 병인양요 겪게됨.
오늘날, 패권국의 지위에서 흔들리는 미국이 아시아에 대한 장악력 유지하려 일본을 띄워주고 있는입장
이를 불편하게 쳐다보는 중국, 그 사이에 처해진 한국.
현실감 가지고 제대로된 외교 못 펼치면 2차 병자호란 겪을수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