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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_올바른 성경적 결혼관을 정립하라[1]_2016.3.4
2019-10-09 14:58:02 | ahcs | 0 | 조회 1605 | 덧글 0
[주요셉 결혼칼럼]
 
올바른 성경적 결혼관을 정립하라[1]
창세기 2장을 통해 본 10가지 성경적 결혼원리


오늘날 오랜 역사를 지닌 일부일처제(一夫一妻制) 결혼제도는 심각한 위기에 직면해 있다. 쾌락주의와 온갖 성적 일탈, 계약결혼, 반복되는 이혼, 동성애, 일부다처제, 첨단과학기술발달에 의한 사이버배우자, 로봇배우자 등의 도전을 받고 균열을 일으켜 붕괴의 조짐마저 보이고 있다.
 
현대문화는 성적 친밀감이 결혼의 울타리 내에서만 가능하다는 생각을 대부분 부정한다. 요즘 유행하는 노래/뮤직비디오/뮤지컬/TV드라마/영화/소설 등은 마음 내키는 대로 살아가는 걸 칭송하는 내용들로 채워져 있다. 하나님께서 제정하시고 가장 안정적으로 인류역사에 정착한 일부일처제결혼제도는 비혼 및 불혼 풍조, 혼전동거문화의 확산, 결혼 후 불륜의 법적 비처벌(非處罰) 등으로 점점 빛이 바래지고 있다. 구약성경에도 특정한 시대에 일부 믿음의 사람에게서 일부다처제(一夫多妻制)의 모습이 보이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한시적이고 예외적인 경우에 해당한다. 크리스천은 그릇된 공상과 행동으로 빠지기 쉬운 회색지대를 피하고 순수한 마음을 고집스럽게 지켜 결혼에 이르러야 한다. 그래야만 결혼 후 배우자와 친밀한 관계를 안정적으로 누릴 수 있음은 물론이다.
 
요즘 우리사회뿐만 아니라 전 세계는 난잡한 성생활의 비싼 대가를 치르고 있다. 이혼과 폭력으로 인한 가정의 비극, 만연하는 성병, 성범죄로 인한 수많은 피해자들, 불륜과 프리섹스의 만연, 낙태로까지 이어져 수많은 생명을 살해하는 이러한 현상을 보면 성과 결혼에 대한 하나님의 본래 계획을 진지하게 고민해야 한다는 것이 더욱 명백해진다. 혼전 성관계가 안정적인 결혼으로 이끄는 경우는 거의 없으며, 이 점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은 ‘결혼제도 내에서의 안정적 부부관계’로 요약된다. 특히 창세기 2장 18-25절에 보면 ‘10가지 성경적 결혼원리’가 나오는데, 그 외 세부적 결혼원리는 다음에 설명하기로 한다. 먼저 위 성경본문을 중심으로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기본원리를 파악해 흔들리고 왜곡된 결혼가치관이 재정립됐으면 하는 바람이다.
 
첫째, 결혼은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제도라는 것이다. 만일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시지 않았다면, 결혼제도 자체가 존재치 않았을 것이다. 인간은 사회를 안정적으로 유지하고 보호하기 위해 수많은 제도를 만들어 편리와 유익을 도모해왔지만, 결혼제도는 태초부터 인간이 개입하기 이전 인간을 위해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제도인 것이다. 사회가 성립하기 이전에, 국가가 성립하기 이전에 이미 하나님께서 계획하셔서 인간에게 허락해주신 제도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온전한 결혼을 이루고 지키나가려면 하나님 말씀(뜻)에 귀를 기울이고, 수시로 하나님께 조언 및 도움을 구하며 배워가야 하는 것이다. 이를 놓치고 세상지식이나 잘못된 종교의 가르침을 따랐다가는 낭패를 볼 수밖에 없다.   
 
둘째, 결혼은 하나님의 주권영역에 속한 것이다(18절). 다시 말해 하나님께서 사람과 언약(言約)을 맺으셨다는 것이다. 만일 남녀 두 사람만의 선택과 약속으로 모든 게 끝난다면 하나님께서 굳이 통제하거나 제정치도 않았을 것이다. 애초부터 여러 사람을 만드시고 사람들이 알아서 제 짝을 찾아가든, 수시로 짝을 바꾸든 내버려두셨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분명하게 처음부터 특별한 의도를 가지시고 결혼제도를 만드셨다. 그리고 주권적으로 개입하셔서 남자에게 여자를 이끌고 오셔서 결혼시키고, 가정을 허락해주셨다. 왜냐하면 그게 가장 인간에게 이상적이고 안정적인 모델이었기 때문이다.
 
18절 “여호와 하나님이 가라사대 사람의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에는 하나님께서 왜 결혼제도를 만드셨는지 비밀이 감춰져 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의 독처하는 걸 좋게 보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천지만물을 지으실 때 만드신 모든 것을 다 좋았더라고 하셨지만, 유독 사람에게만 좋지 않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렇다면 애초에 하나님께서 실수하신 것일까. 실수가 없으시고,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왜 처음부터 흙으로 남녀를 지으시지 않고, 아담만 먼저 지으신 것일까. 그리고 왜 일정기간 홀로 거하도록 해 짝 없는 외로움을 느끼게 하셨던 걸까. 이는 어쩌면 하나님께서 완벽히 의도하시고, 사람을 깊이 배려하신 깊은 뜻이 있었던 게 아닐까. 소중한 배우자를 아무런 수고로움 없이, 모든 게 넉넉하고 풍족한 가운데 맞아들였다면 훗날 살다가 예기치 못한 어려움에 봉착했을 때 하나님을 원망하고 쉽게 갈라설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어쩌면 남녀가 만나기 이전부터 개입하여 결혼한 이후에도 절대적으로 하나님만 의지하라고 그렇게 의도하셨는지도 모른다. 우리 주변에서 결혼하는 사람들, 인류역사상 수많은 사람들의 결혼이야기를 들어보면 인간의 영역을 넘어선 절대영역이 엄연히 존재함을 부인할 수 없다. 지금까지 전혀 몰랐던 남녀가 거짓말처럼 어떡하든 만나게 되고, 우여곡절 끝에 결혼하게 되는 이야기는 사람의 힘과 노력만으로는 설명이 불가능한 영역인 것이다. 여기엔 절대적인 주권을 통해 인간을 겸손케 하시고, 처음부터 끝까지 책임지시려는 하나님의 깊은 사랑의 마음, 인간끼리의 불완전 때문에 시행착오를 겪고 갈라서는 걸 예방코자 하는 깊은 배려심이 깔려 있다고 본다. 그러기에 우리는 무조건 하나님께 무릎 꿇고 결혼하기 전 기도해야 하며, 결혼 후에도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날마다 상기하며 일평생 그런 자세 잃지 말아야 할 것이다.
 
셋째, 남자와 여자의 결혼원리이다(22절). 여러 차례 ‘차별금지법’의 입법발의로 인해 많은 기독교인들과 양식 있는 일반국민들의 반대가 극심했었다. 다행히 지금까지는 입법을 철회했고, 19대국회에 계류 중인 발의안도 자동폐기의 수순을 밟겠지만, 언제든 다시 입법 발의할 수 있기에 관심을 갖고 기도 줄을 놓아선 안 될 것입니다. 세상은 포스트모더니즘의 영향으로 상대주의적 윤리관과 퓨전의 가치관이 횡행하고 있기에, 계속 그러한 추세로 나갈 것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성경에서 가르치는 남자와 여자와의 결혼을 벗어난 걸 정상이라 할 순 없다. 하나님께서는 한 사람 안에 남자와 여자의 양성(兩性)을 만드시지도 않으셨고, 남자와 남자, 여자와 여자의 성행위를 인정하시지도 않으셨다. 다만 이러한 동성애성향은 어릴 적 가족 내에서의 성역할의 왜곡과 일탈로 인한 후유증, 후천적 호기심과 강제체험에 의한 경우가 대부분이기에, 그런 이들을 배척과 혐오가 아닌 사랑과 긍휼의 시선으로 바라보며 위하여 중보 기도해야 할 것이다.
 
넷째, 돕는 배필의 결혼원리이다(18, 20절). 하나님께서는 홀로 독처하는 것을 기뻐하지 않으셨고, 인간도 홀로 존재할 때 외로움과 고독감을 크게 느끼며 인생에 어려움을 겪는다. 다만 ‘독신의 은사자’일 경우엔 그러한 외로움의 강도가 덜하며 홀로 견뎌내는 데 일반인만큼 큰 어려움을 겪지 않으며, ‘결혼은사자’인 일반인은 그렇지 않다(고전 7:7). 그런데 독신은사자는 그 비율을 찾으면 강변의 돌멩이 하나처럼 아주 극소수다. 이를 억지로 제도화한 가톨릭의 성직독신제도는 라테란1.2차공의회의 산물로, 1천년의 역사가 채 안 된다. 이로 인한 폐해와 후유증은 역사가 증거하기에, 더 이상 언급할 필요 없으리라.
 
아울러, 하나님께서는 가정이 힘의 원리에 의해 지배되지 않고, 사랑과 섬김의 원리에 의해 다스려지길 원하셨다. 신약성경의 여러 곳(고전7장, 엡5장, 벧전3장, 골3장 등)에서 아내와 남편의 도리에 대해 교훈하고 있는데, 남편이 아내를 일방적으로 지배하도록 훈계하지 않으셨다. 다만 아내는 남편을 머리로 세우고 존중하는 마음으로 섬겨야 하고, 남편은 아내를 자기 몸처럼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섬겨야 하는 차이가 있을 뿐, 서로 돕는 배필의 위치에 있는 건 동일하다 할 것이다.
 
다섯째, 일부일처제의 결혼원리이다(22-23절). 하나님께서는 아담의 갈비뼈 중 여러 개가 아닌 한 개로 여자(하와)를 만드셨기에, 하나님의 뜻이 일부일처제임이 분명하다. 그런데 후대에 귀족과 왕족들이 이를 어기고 자신들의 권한을 남용하여 많은 아내를 거느리게 되었는데, 이 또한 신명기 17장 16-17절의 왕(王)의 ‘3가지 증식(增殖)금지규정’(말馬, 아내, 재물)에도 어긋나는 일이다. 이를 호도하는 성경해석자와 설교자는 하나님 편에서가 아니라, 인간의 편에서 사심을 채우려는 그릇된 동기로 성경을 해석한 것일 뿐이다. 한 남편에 한 아내는 하나님의 원래 뜻이며, 인간의 탐욕으로 인한 다처(多妻)와 결혼제도 밖의 외도는 하나님께서 금하시는 죄임을 분명히 깨달아야 한다. 심지어 다윗도 많은 아내를 둔 대가를 자식 대에 혹독히 치렀음을 성경은 분명히 기록하고 있다.
 
여섯째, 남녀동등(평등)성의 결혼원리이다(22절). 하나님께선 아담의 머리뼈도 발목뼈도 아닌 갈비뼈를 취하여 하와를 만드셨다. 앞서 언급했듯,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가정은 힘의 원리가 아닌 사랑과 섬김의 원리로 작동되어야 하며, 하나님 앞에 동등한 피조물이라는 겸손한 자세가 필수적이다. 후대에 인류가 남성위주의 사회로 발달되면서 남성우월적 사회문화가 일반화되었을 뿐, 여성을 비하하거나 무시하는 건 하나님의 본래 의도가 아니다. 그로 인해 오늘날 여성중심, 여성우위의 사고로 무장하여 그걸 주장하는 이들이 있는데 이 또한 잘못된 것이다. 오랜 세월 제도적으로 억압돼왔고 불이익을 당해왔던 여성의 인권을 존중하고 권익을 보호하려는 차원을 넘어, 첨단IT에 힘입어 남성을 지배하고 억압하려는 미래사회를 꿈꾼다면 이는 결코 바람직하지 않을 것이다. 남자와 여자는 하나님 앞에 동등한 피조물이며, 똑같이 구원받아야 할 죄인이며, 서로를 지배하거나 억압하여 노예로 삼아서도 안 되며, 동등한 인격체로 지음 받은 평등한 존재임을 잊어선 안 되겠다.
 
일곱째, 부모로부터 떠남의 결혼원리이다(24절). 누구나 잘 알면서도 한국사회에선 전통문화의 영향으로 잘 실천하기 어려운 부분이기도 하다. 결혼을 한다는 건 남자는 물론 여자도 부모로부터 심리적, 정신적, 물리적으로 독립선언을 하는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많은 기혼자들이 그러한 분리·독립이 이뤄지지 않아 결혼갈등을 빚는 것을 본다. 한국인만의 정(情)과 효(孝)의 문화 탓이지만, 이로 인한 후유증도 그만큼 큰 게 사실이다. 아무튼 결혼을 기점으로 남자와 여자는 부모로부터 심리적으로 독립하려는 의지를 갖고 실천해야 하며, 재정적으로도 독립하려는 의지를 가져야 하며, 어려운 문제 발생 시 부모 품으로 회귀하고픈 열망에서도 자유로워야 한다. 그건 오히려 불에 기름을 붓는 격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다만 부부중심의 결혼생활을 하는 중 부부합의하에 양가부모와의 긴밀한 유대관계를 맺고 왕래를 자주하고 자녀양육의 도움을 받는 건 상황에 따라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일이라 할 것이다.
 
여덟째, 부부연합의 결혼원리이다(24절). 부부는 서로 뭉쳐야 한다. 아무리 어려움이 크다 해도 부부가 사랑과 신뢰의 끈으로 꽁꽁 묶여 있다면 얼마든지 극복할 수 있다. 부부가 따로국밥처럼 생각 따로 잠자리 따로 돈관리 따로 생활 따로 한다면, 그 틈으로 마귀가 침입해 둘 사이를 갈라놓는 건 시간문제이다. 그러기에 부부는 모든 면에서 연합하려는 팀워크를 강화하고 팀스피릿을 가져야 한다. 한 사람이면 패하지만 두 사람이면 능히 당한다고 했다(전 4:12). 영적 전쟁에 임하는 병사처럼 부부는 결혼생활 중 맞부딪치는 수많은 난관과 장애물 앞에서 흩어지거나 서로 불평원망하지 말고 한마음으로 연합해 대적과 맞서 싸워 승리해야 하며, 또 반드시 그러한 연합정신으로 이길 수 있음을 명심해야 한다.

아홉째, 한 몸 됨의 결혼원리이다(24절). 부부는 하나님께서 특별히 택하셔서 한 몸이 되게 하신 남자와 여자다. 그러기에 부부는 항상 같이 호흡해야 하며, 각자의 일터에서 일하는 시간 외에는 되도록 함께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고 편의상이나 자녀교육을 목적으로 떨어져 지낼 경우 후유증이 클 수밖에 없다. 물론 부득이한 사정으로 원치 않는 주말부부 같은 경우엔, 부부가 긴밀히 연합돼 있음을 평시에 인식하고 그러한 친밀감이 훼손되지 않도록 쌍방 노력해야 한다. 한 몸 됨의 인식에 금이 가게 하는 일방적 부부잠자리 거부(수동공격)나 불륜 및 외도는 절대 금해야 한다. 내 몸이지만 결혼 후에는 내 몸을 내 것으로만 주장할 권리가 없다고 했기에(고전 7:4), 부부는 서로의 필요를 채워주고 한 몸 되려는 노력을 게을리 해선 안 되며, 기도하는 시간 외에는 잠자리를 따로 하지 말아야 한다. 질병, 출산, 과제, 학업 등의 사정으로 인해 한시적으로 각방을 써야하는 경우 외에는 분방하지 말라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임을 명심해야 한다(고전 7:5). 그래야만 사탄의 시험에 넘어가지 않고, 성적인 죄에 빠지지 않기 때문이다.
 
열째, 부부간 수치 없는 결혼원리이다(25절). 부부는 세상에서 가장 좋은 친구가 돼야 한다. 부부는 육적인 대화뿐만 아니라, 혼적인 대화, 영적인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사이여야 한다. 그러기에 결혼 전 배우자를 고를 때 외적조건보다 내적조건, 인격과 됨됨이를 우선시해야 한다. 그런데 오늘날 많은 부부들이 서로 깊은 대화를 나누지 못하고 겉도는 대화, 피상적인 대화수준에 머무는 것을 본다. 그리고 서로에게 약점과 수치를 안 보이려고 애쓰는 경우도 많다. 그렇게 결혼생활을 하다보면 아내나 남편 이외의 이성에게 자신의 고민과 스트레스를 털어놓기 쉽고, 그로 인해 불륜의 유혹에 넘어갈 위험성도 그만큼 커진다. 이는 대단히 안타까운 일이며 불행한 일이다. 부부간 신뢰결여와 대화결핍은 그만큼 부부관계가 안정궤도에 놓여있지 못하는 반증이기에, 부부는 서로 흉금을 터놓고 당면한 문제해결을 위해 가일층 노력해야 한다.
 
물론 그렇다고 부부 사이에 모든 문제를 시시콜콜 다 털어놓으란 말은 아니다. 그럴 수도 없고, 그럴 필요도 없다. 만일 반드시 그렇게 해야 한다는 압박감에 사로잡히면 오히려 강박증이 강화돼 서로 매이게 되고 더 갑갑한 구속감을 느끼는 부작용을 초래할 수 있다. 이는 바람직하지 않으며, 서로가 우상으로 변질될 위험성도 크다. 다만 중요한 문제, 배우자가 반드시 알아야 할 고민거리가 되는 문제가 있을 시 상대방에게 알려줘야 한다는 것이다.
 
자신의 잘못이나 실수로 발생한 문제일 경우 일시적으론 자존심이 상하거나 수치심을 느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그 문제를 회피하거나 숨길 경우엔 나중에 더 큰 문제가 발생해 ‘호미로 막을 걸 가래로도 못 막는다.’는 속담처럼, 더 큰 낭패와 불상사를 겪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깨진 부부를 여럿 알고 있기에 이는 매우 중요한 문제다. 다만 그렇게 자신의 수치를 있는 그대로 드러내도 그것을 충분히 받아주고 감싸 안아줄 수 있는 넉넉하고 넓은 도량의 배우자냐 아니냐가 중요하겠지만 말이다. 아무쪼록 이 글을 읽는 분만이라도 그런 배우자가 되었으면 하며, 미혼자일 경우 앞으로 그런 미래배우자가 되어야겠다고 다짐했으면 한다.
 
2016.3.4 
시인/소설가/결혼사역자/반동성애운동가
헤세드결혼문화선교회 대표 www.hesedwem.net
반동성애기독시민연대 대표 www.antihomo.net


http://cafe.daum.net/ahcs/eMRT/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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